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게 연예계 불문율이지만, 어느 날 임영웅에게 들어온 물은 해일이나 쓰나미에 가깝다. 한 아티스트의 인생에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을 일, 모든 아티스트들이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그는 매일 더 큰 파도를 타며 겪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물결에 휩쓸리거나 휘둘리지 않고 점점 더 큰 바다로 나아간다.
지난 8월 22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언론배급시사회가 있었다. 용산역부터 영화관까지 하늘색 옷을 입은 영웅시대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들로 인해 행사가 지연되거나 복잡해지지 않았다. 영웅시대는 질서정연하고 정숙했다. 임영웅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왔지만, 그를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임영웅을 기다렸고, 임영웅은 약속을 지키는 연인처럼 정시에 나타났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노래로 세상을 바꾼 사람은 드물다. 임영웅의 노래는 세대 간 장벽을 허물고 장르 안의 가림막을 헐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을 직접 쓰고 만들어 부른다. 트로트부터 발라드, 힙합과 EDM까지 접수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임영웅은 싱어송라이터인 동시에 영화에 출연한 배우다. 그의 공연 실황과 1년여에 걸친 공연 준비과정은 한 편의 영화가 되어 영화관에 걸렸고, 8월 28일 개봉한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은 공연 실황 영화 부문 매출 1위를 기록 중이다. 그러나 임영웅과 영웅시대의 성과는 숫자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이들이 특별한 이유는 외적인 수치보다 내적 친밀감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서로 닮았다. 임영웅의 공연이나 임영웅이 등장하는 곳에는 압도적인 수의 영웅시대가 모이지만 이 일로 소란해진 적은 없다. 이들은 서로의 곁에서 단정하게 서로를 지킨다.
너무 이르게 겪은 이별의 아픔 때문일까. 아끼는 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늘 곁에 있겠다”고 말하는 임영웅. “궂은 비가 오면 내가 우산이 되어주겠다” 노래할 뿐 아니라 실제로 공연장에 비가 오면 자기는 비를 맞고 팬들에게 우비를 내주는 가수. 그는 아무도 실망시키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지금 우리 곁에 있다. 가사와 삶이 ‘송(song)행일치’ 된 덕분에 그의 모든 행보는 한 편의 영웅 서사가 됐다.
#1. 히어로 임영웅
나만 두고 가던, 나만 스쳐 간 행운이 모여
그대가 되어서 내게 와준 거야
…
이 세상은
우리를 두고 오랜 장난을 했고
우린 속지 않은 거야
이제 울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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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만 믿어요’ 중
“지금, 제가 임영웅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2024년 5월 25일 서울월드컵경기장 무대에 오른 임영웅이 5만여 명의 관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임영웅을 보기 위해 10만 명이 모였다. 공연장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관객들은 눈앞에 있는 임영웅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임영웅 자신도 그렇다. 눈앞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관객들을 보면서, 이들이 보러 온 사람이 정말 나인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축구인에게나 가수에게나 꿈의 무대다. 축구를 사랑하고 노래에 진심인 임영웅에게는 더 특별한 곳이다. 그동안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한 가수는 서태지, 빅뱅, 싸이, 세븐틴 등이다. 이후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잔디가 망가진다는 이유로 K팝 가수의 공연을 반려했다. 닫힌 빗장이 열린 건 그가 임영웅이어서다.
1년 전 임영웅은 K리그 FC 서울 대 대구 FC 경기에 시축자로 나섰다. 이전에도 시축 제의가 있었고, 국가대표 A매치급 큰 경기도 있었으나 그는 경기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고사하다가 이번엔 K리그의 흥행을 기원하는 의미로 동참했다. 그는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축구화를 신고 시축을 한 후 VIP석이 아닌 일반석에서 축구를 관람했다. 축구장을 찾는 팬들에게는 미리 “영웅시대 옷이 아닌 축구팬의 옷을 입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을 하는 경우, 가장 비싼 좌석은 그라운드석이다. 이 자리를 관객으로 채우기 위해 공연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대 위의 아티스트를 가장 좋은 위치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영웅은 그라운드석을 아예 비웠다. 객석이 채워지면 잔디가 짓밟힌다. 무대도 그라운드 밖으로 설치하고, 모든 구조물은 공연 직전에 설치했다가 공연 직후 해체했다.
그라운드 한가운데 설치한 이동식 무대는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지지대를 둬서 잔디 훼손을 최대한 줄였다. 잔디 위에는 대신 흰 천을 둘렀는데 그 위로 미디어아트, 임영웅의 손글씨, 바다의 파도 등이 보일 수 있도록 무대를 연출했다. 공연을 본 뒤 관계자들은 “이렇게 공연할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동안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