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빠람 이박사 “난 독창적이고 대한민국에 긍지가 대단한 음악가…그런데 나라에서 공로패를 안주네?” (인터뷰)
2020.09.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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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어떤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선 사람을 두고 흔히 ‘장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비슷한 의미라도 신빠람 이박사에게는 ‘장인’보다 굳이 ‘대가’(大家)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둘 모두 포괄적으로 전문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장인이 어딘가 홀로 고독하게 외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대가는 자수성가하여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일구어낸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박사가 무슨 ‘신빠람 이박사 음악교실’을 설립해서 ‘뽕짝의 후계자’들을 배출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신빠람 이박사는 스스로의 경험에 독학으로 터득한 음악 이론을 더해 트로트와는 결이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뽕짝’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또 이런 신빠람 이박사 특유의 스타일은 은근히 국내 일렉트로닉과 테크노 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실제 신빠람 이박사는 아수라발발타, 미미시스터즈, 윈디시티, 임창정 등 뮤지션들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고, 일본에서는 유명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덴키 그루브와 합작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지금에 와서는 코리안 테크노의 개척자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스스로는 뽕짝 가수라고 자평하긴 하지만, 신빠람 이박사는 한국 가요계에서 한 분야의 개척자이자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음악가임은 분명하다.
그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신빠람 나는 ‘음악 철학’, ‘뽕짝 철학’을 직접 들어보았다.
▲이하 일문일답
Q.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나?
신빠람 이박사 “코로나19때문에 주춤하고 있다. 행사는 안 된다. 행사를 해도 문제다”
Q. 신곡 ‘술이 웬수다’ 나왔다.
신빠람 이박사 “2001년도 이후 정통 트로트 외에는 처음 나온 거다. 2001년 이후에 정통트로트를 많이 냈다. 그 후에 요즘에 신세대를 위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전엔 중년 노래를 많이 냈다”
“‘술이 웬수다’는 젊은 사람을 위해 나온 음악이다. ‘만복이’, ‘달고나’, ‘출출해’ 그런 느낌이다. 그 다음에 냈던 곡은 다 다른 사람에게 준 곡이다. 제자들한테 줬다. ‘좋은 남자 좋은 여자’, ‘꽃나무 인생’, ‘당신은 금메달’ 등이 있다.
가수 금산에게 ‘당신은 금메달’, ‘좋은 남자 좋은 여자’를 줬고, 김종만에게는 ‘수원성에서’를 줬다. 가야금 치는 임소혜라고 있는데 거긴 ‘아가야’라는 곡을 줬다. 모종희에게 ‘가지 말라고’, 전철근에게 ‘신나는 내 청춘’, 조찬찬에게 ‘인생은 60부터’, ‘꽃나무 인생’, ‘첫사랑 블루스’, ‘애당초’, ‘반갑다 친구야’, 금도희에게 ‘나나나’, 김선아에게 ‘여보야’, ‘용산역 블루스’를 줬다.
남에게 준 곡은 2006년부터 4~5년 정도에 다 만들어줬다. 요 근래 만든 노래는 ‘야야야’, ‘룸바 룸바 룸바’인데 내가 부르고 있다. 이번에 ‘술이 웬수다’는 받은 노래다. ‘문선수와 뜻밖의 콜라보’가 쓴곡이다.
내가 곡을 받아서 한 건 1990년 이후 처음이다. 90년에 메들리 붐이 일어났고, 그다음에 남이 줬었는데 심의에 걸려서 못했다. 내가 작사 작곡한 노래로 1991년부터 했다. 그때부터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거다.
‘술이 웬수다’는 젊은 친구가 내 팬인데, ‘몽키매직’에 맞춰서 만들어준 거다. 노래가 재밌다. 중독성 있고 재밌다. 술 먹는 사람은 다 좋아한다고 하더라. 또 그렇게 돼야 한다”
Q. 제자들이라고 했는데 후학 양성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신빠람 이박사 “다른데서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더라. 그래서 그냥 내가 도와주는 차원에서 한 거다. 남는 것도 없이 작품료만 받고 했다”
Q. 신곡이 나온 소감을 말해달라.
신빠람 이박사 “날이 밝았다. 아침에 산속에 송이버섯이 나오듯 나올 것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송이버섯처럼 꼭 필요한 노래가 될 거다. 술은 낮과 밤이다. 조금 마시면 낮이고 많이 마시면 깜깜한 밤이다. 블랙매직처엄 밤에 원숭이가 마술사가 된다”
Q. 활동명에 ‘신빠람’이 붙었다.
신빠람 이박사 “‘신빠람 이박사’가 정식 네임이다. 신빠람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거다. 신빠람은 창조적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 유행바람, 신빠람이다. 요즘 트로트 바람 불 듯이 바람을 일으키려한다”
Q. 사실 신빠람 이박사의 음악은 트로트라고 하기도, 일렉트로니카 혹은 테크노라고 하기도 어려운 장르다. 장르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신빠람 이박사 “음악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를 해야한다. 어렸을 때는 락을 했고 그다음 민요를 했다. 경기민요. 그다음에 정통 트로트를 했다. 그다음 세미트로트, 그다음 메들리 했다. 그리고 일본 갔다 오면서 테크노 뽕짝 대백과사전을 냈다. 트로트가 아니라 ‘뽕짝’이다. 트로트는 외국말이다. 한국말이 아니다. 한국어는 뽕짝이다. 걸을 때 뽕짝 뽕짝 하고 걷지 트로트 트로트 하고 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건 ‘테크노 뽕짝’이다. 박자도 다르다. 이박사는 테크노 뽕짝이다. ‘야야야’는 락뽕이고, ‘룸바 룸바 룸바’는 스윙락이다. 이번에 ‘술이 웬수다’는 동요뽕이다. 그래서 되게 쉽다 애들도 따라할 수 있다”
Q. 뽕짝이라는 건 무엇인가?
신빠람 이박사 “뽕짝은 오른쪽 왼쪽 같은 거다. ‘뽕, 짝’ ‘뽕, 짝’이다. 눈이 두 개, 귀가 두 개인 것처럼 두 글자다. 뽕은 베이스고 짝은 하이다. 트로트는 상중하(上中下)다. 난 인생 독학이다. 관광가이드 11년간 하면서 버스에서 하버드, 서울대, 도쿄대, 건달까지 다 만났다. 거기서 가이드를 했다. 11년간. 그런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살면서 귀동냥으로 배운 거다. 그런 인생을 통해 배운 지식이 뽕짝이다. 두 개 짝이 맞아야한다.
뽕짝과 세미 트로트은 뭐가 다르냐면, 뽕짝은 로우와 하이가 같이 붙는다. 그런데 세미 트로트는 중간에서 논다. 옛날 트로트는 세미가 없다. 나는 그렇게 배워온 거다. 거기서 민요까지 해서 내 음악은 리듬이 끊어지는 게 없다. 테크노는 기계적으로 만드는 음악이다. 아날로그가 아니다. 테크노는 시작부터 끝까지 쭉간다. 그 테크노라는 걸 이미 관광 가이드 하면서 쭉 한 거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테크노더라”(※사족을 덧붙이자면, 11년간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독학으로 깨우친 음악이론이 뽕짝이고 테크노라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Q.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신빠람 이박사 “엔카 음악을 내가 다 디스코, 테크노로 리믹스를 했다. 그걸 덴키 그르부와 같이 했다. ‘오레와 우츄노 판타지’(オレは宇宙のファンタジー)는 엄청나게 나갔다. 나도 그 앨범은 없다. 정말 귀하다. 내가 그때 일본에서 지금 임영웅이나 송가인 정도였다. CD판매량 1위했고 내 코너가 따로 있었다. 그 사람들 말로 음반 판매대를 따로 만든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하더라.
처음에 내가 일본에 갔는데 (일본사람들은)외계인인줄 알았다. 팬들이 다 머리색이 노랗고 파랗고 그러니까 신기하더라. 또 친절하다. 사진 한 번 찍어주니까 인사를 열 번씩 하더라. 친절을 배웠다. TV프로그램도 많이 나갔다. ‘헤이 헤이 헤이’에도 나가서 라이브를 했다. 가수로서는 도쿄대에서 한국의 뽕짝으로 강의를 했다. 한 시간 강의를 하고 그랬다”
Q. 당시 찍은 광고도 큰 인기였다고 들었다.
신빠람 이박사 “에프킬라(살충제) 광고를 찍었다. 내가 준비한 의상을 입고 나갔는데 대박이 났다. CF가 1분짜리였는데 그것도 드문 거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그거 로얄티도 많이 받았다. 일본에서의 활동은 음식이 안 맞는 거 말곤 좋았다”
Q. 다시 일본 활동을 할 계획은 없나?
신빠람 이박사 “사실 작년에 일본에서 전속제안이 왔었다. 그런데 내가 싫다고 했다. 전속은 한번이다. 음식도 안 맞는고 고달프다. 쉬는 시간이 없다. (예전에 활동할 때)하루도 못 쉬었다. 그때 내가 몸무게가 41Kg이었고 담배를 하루 3갑반을 폈다. 그리고 원래 얽매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자유롭게 사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또 일본 활동이 좋았던 건 내 말, 한국어를 배운다는 거다. 일본 젊은 친구들이 한국어 학원을 만들어서 가르치고 그랬다. 일본에서 신빠람 이박사 대박과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팬클럽회장과도 코로나19 전까지 계속 연락을 했다. 그 친구가 한국에 오면 우리 집에서 며칠씩 자고 가고 그랬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금 코로나19 때문에 연락이 안 된다”
Q. 그렇게 잘나가고 있었는데 다리부상으로 모든 활동을 접어야했다.
신빠람 이박사 “2001년 6월 중순경에 떨어져서 다쳤다. 나무 자르는데 사다리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1m도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냥 뛰었는데 뼈가 부러졌다. 빨리 나으려고 사골을 엄청나게 먹었다. 그래도 지금도 다리가 쑤신다. 그 다음부터 9년을 쉬었다. 큰 공연 아니면 안했다”
Q. 항간에는 그렇게 쉬면서 100억 원의 손해를 보았다는 소문이 돈다.
신빠람 이박사 “일단 76평 집이 날아갔다. 두 번째 58평 집이 날아갔고 33평 집이 날아갔다. 그 다음에 사무실 전세가 날아가고 통장이 날아가고 그랬다. 2년 짜리 스케줄을 다 쉬었다. 공연하는 사람이 망하면 집이 먼저 정리가 된다. 그렇다고 실제 (내돈)100억이 날아간 게 아니라 그 정도 벌 수 있는 스케줄이 있었는데 못 벌게 됐다는 거다”
“나는 ‘또 다시 되겠지’하는 생각이었는데 날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그때 당시 나는 노래 부르고 100만원씩 받는 걸 이해를 못했다. 난 1000만원, 1500만원 받으니까 그랬다. 지금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지금은 좋은 회사 만나서 잘하고 있다. 음반 만들어주고, 소가 비빌 언덕 같이 믿고 있다”
Q. 지금 있는 회사는 마음에 드나?
신빠람 이박사 “여기 매니저가 음악에 대한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있고 또 감수성이 예민해서 정확하다. 부지런하고 완벽주의자다. 사실 그래서 나와는 안 맞는다. 난 털털하다. 그런데 일을 하니까 정확한 사람이 필요하다. 좋은 사람들이다. 난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사족으로 현재 이박사의 회사인 빅대디 엔터테인먼트의 관계자는 ‘회사와 이박사는 이전까지 전혀 친분이 없었다. 다시 활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서 제안을 드린 거다. 회사와도 잘 맞을 거 같아서 제안했다’라고 섭외 과정을 밝혔다.)
Q. 몇 년 전부터 신빠람 이박사가 저평가됐고 그의 음악을 재조명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신빠람 이박사 “그건 다 그렇다. 원래 한국 사람은 다른 사람이 뭘 하면 잘한다기보다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편이다. 나는 좋게 말하면 창의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멋대로 해라다. (저평가가)속상하진 않다. 나는 나고, 하고 싶은 건 한다”
Q. 특유의 목소리와 창법은 타고난 건가 만들어낸 건가?
신빠람 이박사 “타고난 게 50%, 만든 게 30%, 경험이 20%다. 관광가이드를 하다보면 그 사람 마음을 파악해야한다. 팔도사람이 다 모이니까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다 흡수하다보니 이렇게 됐다. 그런데 내가 재미난 쪽을 하다보니까 자꾸 생각이 나는 거다. 리듬을 타면서 노래하는 것에 천재적인 감이 있다. 그 누구도 (나처럼 노래하는)그건 못한다. 내가 들어도 잘한다. 쉴 새 없이 쭉 나온다”
Q. 노래에 인사하고 내레이션을 집어넣는 건 어떤 의도인가?
신빠람 이박사 “내가 일본에 갔는데 나보고 일본가수라고 소개를 하더라. 그래서 ‘난 대한민국의 신바람 이박사’라고 말하다보니까 길어졌다. 그게 그대로 노래에 들어갔다. 난 대한민국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데 나라에서 공로패를 안준다. 난 일본에서 한국말을 가르쳤다”
Q. ‘깡키매직’으로 유튜브 활동도 하고 있다.
신빠람 이박사 “유튜브에서 ‘깡’을 들으니 ‘몽키매직’이 어울릴 거 같았다. 박진영이 비에게 ‘깡’은 너와 안 맞는다고 했다더라. 그런데 내가 볼 때 ‘몽키매직’과 ‘깡’이 맞았다. 그런게 재밌는 거다”
Q. ‘깡키매직’에서 댄스도 보여주는데 원래 춤도 좋아했나?
신빠람 이박사 “젊었을 때 역 근처서 열차 기다리면서 하루 종일 춤추고 놀았다. 그런데 다리 다치고 나면서 많이 안한다”
Q. 또 유튜브 등으로 보여줄 콘텐츠가 있나?
신빠람 이박사 “이제 ‘술이 웬수다’ 뮤직비디오 찍으려고 한다. 콘셉트는 술에 취한 모습을 찍으려고 한다”
Q. 후배 가수들의 노래도 듣나?
신빠람 이박사 “열심히 듣는 건 아닌데 그냥 본다. (요즘 친구들 중에)나와 같이 할 만한 친구는 없는데, 좋아하는 애는 류지광이다. 그런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김호중 같은 목소리도 힘이 있어 좋아한다”
Q. 지금의 트로트 열풍은 어떻게 보나?
신빠람 이박사 “열풍이 오는 이유는 지금 문화, 스포츠, 오락이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스포츠가 묶였다. 그러다보니까 음악이 살 수 밖에 없다. 듣는 거만 한다”
Q. 컬래버레이션 계획도 있나?
신빠람 이박사 “가수들이 같이 하자고 많이 연락이 온다. 그런데 큰 영양가가 없다. 나는 이미테이션, 상술적이지 말고 독창적이고 예술적으로 가라고 한다. 예술 하면 돈이 멀어지고 돈을 생각하며 예술이 멀어진다. 음악자체가 예술로 가야하는데 상품으로 간다. 난 그게 아니다. 비슷비슷하게 가는 건 상품화로 가기 때문이다. 작사 작곡가가 돈을 보기 때문에 그런다”
Q. 끝으로 앞으로의 목표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신빠람 이박사 “이제 마지막 인생이다. 이번에 잘해야 마지막까지 탄탄대로로 간다. 그래도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다. 뭐든지 뜬다고 하면 안 뜬다. 말 그대로 신빠람이 불어야한다. 요즘은 악센트가 강한 세상이라 신바람이 아니라 ‘신빠람’이다”
“음악 외엔 내가 글을 쓴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예능도 다 나갈 수 있다. 재미나게 하고, 내가 재주가 있다. 남이 모르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런 걸 내가 하는 게 있다. 관광하면서 배운 건데, 생각지 않게 좋은 말이 나온다. 대신 말이 좀 직선적이다”
“목표라면 CF나 하나 들어오면 좋겠다. 첫 번째는 코로나 빨리 없어지고 두 번째는 CF 들어왔으면 좋겠다. 세 번째는 열심히 살겠다. 네 번째는 라디오든 어디든 연결해주면 열심히 하겠다. 바람이 쭉 불면 들어오지 않을까 싶다”
(사진제공=빅대디 엔터테인먼트)
최현정 기자 gagnrad@idol-chart.com 저작권자 ⓒ 아이돌차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